활화(活畫), 연결하는 회화 – 나오미의 근작들
세로 227cm, 가로 910cm에 달하는 나오미의 대작 <파시波市>(2022)를 다 보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림 속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어선과 상선들, 온갖 종류의 새들, 물고기와 고래를 잡는 어부들, 넘실거리는 파도와 연기, 바위와 산, 공장, 그리고 어구들과 큼지막한 닻 같은 것들이 한자리에 모여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작품 제목인 ‘파시’는 어장 인근에서 어선과 상선 사이에 어획물 매매가 이루어진 해상시장을 뜻한다. 해마다 조기철에 열린 연평도 파시는 특히 유명했는데 여기서는 조기 떼를 따라 서해 대청도, 어청도, 백령도 등지에서 조업 후 만선기를 달고 입항하는 어선들과 전국에서 몰려온 상선들이 어울려 배가 땅이 되고 수평선이 사라지는 것 같은 풍경이 연출됐다고 한다. 1970년대 초반 어떤 신문에서는 이를 “바다가 흥청거린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서해에서 조기가 자취를 감추면서 연평도 파시는 중단됐다.
나오미에 따르면 <파시>의 제작은 1930년대 서해 연안의 해상시장을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했다. 이후 나오미는 해상시장에 관한 온갖 자료을 수집했다. <파시>에서 보이는 고래잡이 풍경은 1930년대 초반까지 번창했던 동양포경주식회사의 대청도 고래잡이 관련 자료들을 참조한 것이고 화면 곳곳에 등장하는 새들은 서해 매립과 개발로 인한 생태계 혼란으로 사라지고 있는 조류들에 관한 자료들을 참조해 그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1930년대 고래잡이 풍경과 더불어 1960~1970년대 파시 전성기의 광경들, 그리고 최근 해안 공장지대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파시>의 큼지막한 화면 속에는 여기와 저기,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온갖 것들이 동시에 펼쳐져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서로 대화하고 충돌하면서 아주 독특한 활기를 창출하고 있다. 그 활기 덕분에 파시는 마치 내 눈앞에서 지금 생생하게 진행 중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활기가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방금 나는 그것이 “내 눈앞에서 지금 생생하게 진행 중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썼지만 사실 파시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이미 1970년대에 파시는 중단됐고 지금은 그 광경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문 실정이다. 따라서 <파시>는 활기를 잃고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한 어떤 것들에 대한 애착이나 향수를 표현한 회화, 상실감이나 멜랑콜리에 호소하는 작품일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에서 사실상 멜랑콜리의 흔적을 좀처럼 찾을 수 없다. 그것은 확실히 소멸한 것이지만 소멸한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마도 작품 앞에서 내가 느낀 독특한 활기 때문일 것이다.
나오미는 통상 예전의 활기를 잃었다고 여겨지는 것들, 죽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서 기능하는 현상들에 관심이 많다. 예컨대 나오미의 영상작업 <바다의 신, 바다를 건너간 신>(2022)은 맥아더 장군을 몸주신으로 모시는 이정자 만신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바다의 신’과 ‘바다를 건너간 신’을 이야기한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웅녀가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한 공원에 18m 높이의 ‘백의신녀상’으로 형상화된 것이나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동상으로 또는 이정자 만신의 세계 속에서 바다의 신으로 형상화된 사례들이 그것이다. 일단 나는 여기서 변치 않고 살아있는 존재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눈길은 이내 변하지 않은 것들이 아니라 변한 것들, 그러니까 심층의 원형을 중시하는 이들이 표층의 수다스러운 것들이라 간주하여 폄훼하는 것들을 향한다.
활기를 잃은 것들은 어떻게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이른바 ‘아카이브 충동’에 이끌린 미술가들이 “새로운 연결”을 통해 “삶의 실패한 전망들을 대안적인 사회적 관계를 위한 가능한 시나리오로 되찾으려고” 하거나 “유토피아적 요구의 부분적인 회복”을 추구한다는 할 포스터(Hal Foster)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을 것 같다. ‘웅녀’와 ‘백의신녀상’의 독특한 연결은 확실히 뭔가 독특한 활기를 창출한다. <파시>의 경우는 어떤가? <파시>를 비롯한 나오미의 작품들 다수가 큰 규모를 자랑할뿐더러 파노라마처럼 길쭉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때때로 이 작품들은 정말로 파노라마처럼, 또는 파노라마를 반으로 나눈 디오라마처럼 둥글게 휘어져 관객들을 감싼다. 여기서 나오미는,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디오라마 형식으로 서사를 전개”했다.
회화가 둥글게 휘어지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지만 실제로 미술사에는 둥글게 감싸는 회화 매체, 또는 형식이 존재한다. ‘병풍’이 그것이다. “사방에 병풍을 둘러친 것 같다”거나 “병풍처럼 둘러 막힌 석벽”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 일러주듯 병풍은 “둘러싸고”, “감싸는” 속성을 지닌 매체다. 흥미로운 것은 병풍이 “닫는” 속성뿐만 아니라 “병풍처럼 펼쳐진 풍경”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펼침”의 속성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병풍은 펼쳐져 나를 둘러싼다. 나오미는 꽤 오래전부터 병풍이라는 매체 또는 형식을 실험해왔다. 그 가운데는 <용오름>(2014)처럼 병풍형식을 취한 것도 있고 <상상의 정원에 진짜 두꺼비들을>(2019)처럼 병풍의 구조를 가시화하는 작업도 있다. 특히 <파시>를 비롯한 이 작가의 최근 작업이 ‘병풍’ 형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파노라마(디오라마)’ 형식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더 적극적으로 둥글게 감싸는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파노라마에 익숙한 표현들은 “급변해 간다”, “전환한다”, “아련히 나타난다”, “휙휙 지나간다” 같은 표현들이다. 옛 신문에서는 “파노라마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어지럽게 한다”는 말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파노라마를 ‘활화 活畫’라고 부른 이도 있었다.
그런데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광경에 둘러싸인 관객은 무엇을 볼까? 병풍과 흡사한 장방형의 스크린을 실험한 무대연출가 고든 크레이그(E. Gordon Craig)는 관객들이 줄거리나 대사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일에 몰두하게끔 만드는 무대를 강조했다. “그들로 하여금 단지 보게 만드는” 무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휙휙 지나가는 것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 눈은 다만 보는 일에 몰입할 따름이다. 이렇게 “보는 일에 몰입하는” 상태는 “디오라마 형식으로 서사를 전개”한 <파시>가 원하는 바일 것이다. 물론 <파시>는 디오라마와 유사하지만 디오라마가 아니고 따라서 파노라마의 지각 조건을 실질적으로 구현하지 못한다. 같은 이유로 보는 일에 몰입하는 ‘홀림’의 상태 역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짧은 몰입의 순간은 그야말로 소멸한 것이 소생하는 놀라운 순간이 아닌가! 옛사람들은 삶이 다하는 순간에 인간의 내면에서 –주마등처럼-잊을 수 없었던 일련의 이미지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말했는데 나는 <파시>가 그와 같은 황홀한 체험을 일깨우는 회화라고 생각한다.
홍지석(미술비평, 단국대학교 교수)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와 동대학원 졸업을 졸업했다. 단국대학교 부설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기획이사, 미술사학연구회 학술이사로 있다. 저서로 『답사의 맛』(2017), 『북으로 간 미술사가와 미술비평가들-월북미술인 연구』(2018), 『미술사입문자를 위한 대화』(공저, 혜화1117, 2018), 『한(조선)반도 개념의 분단사 1』(공저, 사회평론아카데미, 2018) 등이 있다.
Lively Sceneries and Connective Painting: On Naomi’s Recent Work
One needs to dedicate a certain amount of time to observing Naomi’s Lost Village on the Sea (2022), whose large scale reaches 227 cm in height and 910 cm in width. In the painting, truly numerous things exist: fishing and merchant boats, a whole variety of birds, fishers and whalers, undulating waves and smokes, rocks and mountains, factories, fishing tools and large anchors; all gathered together to create a spectacular scenery. The title of Lost Village on the Sea (波市) indicates a market on the sea where fishers and merchants trade the harvest on boats docking near fisheries. The seasonal fish market on Yeonpyeong Island, which used to open every yellow croaker season, was especially famous. Following the schooling croakers, boats entered its port after a boatful of harvests from around Daecheong, Eocheong and Baekryeong Islands on the Yellow Sea. Fisher and merchant boats from all over the country swarmed and entangled to the extent of creating a ground and covering the horizon on the ocean. In the early 1970s, a newspaper article must have described it a “spree on the sea.” However after the mid 1970s, when the yellow croaker disappeared from the Yellow Sea, the seasonal fish market on Yeonpyeong Island had to close.
According to Naomi, the production of Lost Village on the Sea began from a photograph capturing a floating market on the Korean west coast in the 1930s. Since then, she has collected all ranges of material around floating sea markets. The whaling scene in Lost Village on the Sea refers to materials related to Oriental Whaling Company’s business that flourished until the early 1930s, while various appearance of birds is linked to their disappearance caused by the ecological imbalance during reclamation and development of the west coast area. Here, along with whaling scenes from the 1930s, we can also find the 1960–70s landscape of seasonal fish markets, along with more recently developed industrial districts in the coastal area. Within the generous plane of Lost Village on the Sea, all different things from here and there, the past and the present unfold simultaneously. Conversing and clashing, they create an idiosyncratic energy. It is thanks to this energy that Lost Village on the Sea feels as lively as a scene as if it was happening in front of the viewer’s eyes.
What does this energy tell us? I’ve just written that it “feels as lively as a scene that is happening in front of the viewer’s eyes,” yet the seasonal fish market disappeared a long time ago. The market was discontinued already in the 1970s and currently it is hard to find people who even remember the scene. In that sense, Lost Village on the Sea might appear as a painting expressing certain affection or nostalgia toward things that have lost energy and disappeared or are destined to do so, a work that provokes the sense of loss or melancholy. However, I can hardly discover any trace of melancholy from this work. The scene has surely disappeared, yet doesn’t feel extinct, probably because of the idiosyncratic liveliness that I sensed standing in front of the work.
Naomi is interested much in things that are considered to have lost their energy, dead as well as in phenomena of where they yet can function in a lively way. For example, The God of the Sea, God Who Crossed the Sea (2022) centers an interview with Jeongja Lee, a female shaman who serves General MacArthur as her major god and tells us about “the god of the sea” and “the god who crossed the sea.” Those are stories about Ungyeo (熊女) from the myth of Dangun (壇君) erecting as a 18–meters–high statue of “the goddess in white” in a park in the Yanbian Korean Autonomous Prefecture, China; General MacArthur embodied as a statue in Manila, the Philippines or as a god of the ocean in shaman Lee’s world. In the first place, I am amazed by the persistent vitality of beings who continue to live without changing. But soon, my gaze directs toward altering things instead of the unchanged; toward the unappreciated ones in other words, which the believers of deeply rooted archetypes might consider as superficial trivialities.
How can lost vitality in things be regained? According to Hal Foster, artists attracted by so–called “archival impulse” attempt to recoup failed visions in (...) everyday life into possible scenarios of alternative kinds of social relations” or pursue “partial recovery of the utopian demands” through “new connections.” The unexpected connection of ‘Ungnyeo’ and ‘goddess in white’ definitely creates an idiosyncratic energy. What about the case of Lost Village on the Sea? We need to acknowledge that most of Naomi’s works including Lost Village on the Sea aren’t only large–scaled but also take up the form of lengthy panoramas. At times, her works actually curve like a literal panorama or are divided in two as dioramas, surrounding the viewers. As the artist describes, here she “developed the narrative in dioramic form.”
It is hard to imagine a curving format for painting, yet in art history, the surrounding medium or form of painting actually existed, namely as ‘folding screens.’ Like how acquainted Korean idioms describing something to be “as if surrounded by folding screens on all four sides,” or “stone walls enclosing like a folding screen” tell us, folding screen is defined as a medium that “surrounds” and “covers.” What is interesting here is that the folding screen not only “closes” but also “unfolds,” as “a landscape that unfolds like a screen.” The screen unfolds to surround one. Since a while, Naomi has been experimenting with the medium or form of folding screen. Among such attempts, Waterspout (2014) takes up the form of a folding screen, while Imaginary Gardens With Real Toads (2019) visualizes its structure. It is interesting to observe how the artist’s recent work such as Lost Village on the Sea goes beyond the form of ‘folding screen’ and evolves to that of ‘panorama (diorama).’ This indicates that she is more actively experimenting with a form that curves and surrounds. Panoramic expressions adhere to descriptions that it “drastically changes,” “shifts,” “appears translucent,” and “quickly passes.” In old newspapers, we can read expressions that something “turns one vertiginous like a panorama in a chain.”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1910–1945), panoramas were also called ‘lively scenery (活画).’
Yet what do the viewers see surrounded by scenery surrounding them like a panorama? Theater designer Edward Gordon Craig, who experimented with rectangular screens similar to folding screens, emphasized immersive stage rather than plots or lines for the viewing experience, as a stage for “pure viewing.” Within a state where “things pass by quickly,” eyes can only immerse in the act of viewing. This state of being “immersed in viewing” would be the goal of Lost Village on the Sea, whose “narrative develops in dioramic form.” Of course, Lost Village on the Sea is similar to diorama, yet it isn’t one per se. Therefore, it cannot realize the perceptive condition of a panorama in actual sense. For the same reason, the state of ‘enchantment’ immersing into the act of viewing doesn’t last long. However, this brief moment of immersion will genuinely be a surprising moment when disappeared things could finally recoup. People in the past used to say unforgettable images vividly resurge in a dying person’s mind like in a kaleidoscope. I believe Lost Village on the Sea is a painting that awakes such an enchanting experience.
Hong Ji Suk is an art critic. Hong finished undergraduate and graduate school at the Department of Art Studies, Hongik University. He was a research professor at the Korea Culture Technology Institute of Dankook University. He is currently a professor at the School of Fine Arts, Dankook University; a program director of the Association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Art History; and an academic board member of the Korean Society of Art History. He wrote The Taste of Field Research (2017), Artists and Critics Who Went to the North: A Study on Ex–south Korean Artists and Critics (2018), co–published Conversations for Beginners in Art History (2018: Hyehwa 1117) and The History of Division of the Korean (Joseon) Peninsula 1 (2018: Sahoepyeongron) among others.
라오미의 역사화: 21세기의 타블로 비방
고동연(미술사가)
역사적 서사와 현대미술
현대미술에서 예술가는 어떻게 역사적 서사를 재현하고 그것을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는가? 모든 예술가가 공유하는 질문이지만, 역사의 흔적이나 증거가 별로 남아 있지 않거나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기억을 다루는 작가에게는 더 절실한 질문이다. 역사적으로 19세기 프랑스에서 공화정의 시대 연극의 무대 위에서 역사적 인물들이 서로 상호소통하듯이 역사적 장면을 재현한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 살아 있는 회화)’이 등장하였다.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에 있어 특정 국가나 민족의 서사만큼이나 효과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디지털 매체의 시대, 각종 정보를 공유하는 반경, 속도,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 SNS 소통 시대, 사건을 기억하고 공유하는 방식에 대하여 더욱 유연한 태도가 요구된다. 사실 여부를 가늠하기도 어려워졌고, 전에 없이 다양한 계층이 다양한 과거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떠한 각도에서 보는가’에 따라 같은 사실도 다르게 읽혀질 수밖에 없다.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에 대하여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라오미의 회화와 설치가 결국 재현과 역사성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최근 ‘문화역서울 284’에서 거대한 패널 회화를 선보였고, 이번 전시에서 작가이자 전시 디자이너의 역할도 감당하고 있는 라오미의 회화에서 수평으로 펼쳐진 구도는 서로 다른 시, 공간으로부터 유래한 이미지를 펼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에 쉽다. 중국 단둥(丹东)과 압록강을 지르는 철교와 웃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거리감에 따라 다른 크기로 표현되어 있고, 관객은 영화를 보듯이 화면 위를 부유하면서 이미지들을 연결해서 자신만의 스토리를 상상하게 된다. 2차원적인 화면이 확장성을 갖는 순간이다. ‘타블로 비방’에서와 같이 화면 속 특정한 장면은 전체 역사의 흐름 속 결정적인 순간에 해당한다.
나아가서 라오미의 회화에서는 금강산, 인천항, 압록강 근처 국경 지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쉽게 접할 수 없거나 흘러간 과거의 장소나 사건이 등장한다. 고증을 위하여 작가가 직접 인천의 연안부두나 북한과 중국의 국경 지역을 방문하였으나 금강산이나 단둥은 갈 수 없거나 갈 수 없는 곳을 우회적으로 관찰하기 위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천항은 일본 강점기의 아픈 역사적 기억을 지닌 장소이지만 비극의 기억은 매우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다. 작가는 현재 매립되고 있는 북성포구, 기능을 상실한 만석포구, 화수포구와 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낡고 작은 포구 지역에 주목해왔다. 고증과 조사의 단계를 거치더라도 결국 작가의 입장에서나 관객의 입장에서 많은 상상력이 있어야 하는 과정이다.
이에 라오미는 자신의 회화를 한 편의 연극에 비유한다. 부연해 설명하자면, 1920-30년대 토월회(土月會) 회원이자 연극 무대 연출가였던 원세하(元世夏)를 언급하면서 연극 무대의 배경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재질과 크기의 화폭을 상상하면서 그린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라오미는 <유람극장, 금강산관광>(2017)의 캔버스 천을 배경막과 같이 천장에서부터 늘어트렸고, 청계천의 폐허가 된 바다극장에서 열린 전시에서는 무대 위에 거대한 그림을 올리고 그림 앞에서 연주회를 열거나 사운드 작업을 설치하는 등 회화를 연극과 공연예술의 부분으로 확장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라오미는 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데 연극을 아예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었는가? 역사의 장으로서의 연극은 과연 현대 관객들에 의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관객은 정확히 진위를 알 수 없고 망각에 묻힌 라오미 회화 속 과거의 사건, 장소,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21세기의 타블로 비방
비평가 고원석은 라오미의 역사화를 작가의 회화 시리즈 <극장국가>의 타이틀을 빌어서 설명한다. 그런데 고전적인 의미에서 ‘극장 국가’는 현대 국가가 결국 권력을 창출해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조작된 ‘정치적 기재(apparatus)’와 ‘선동’의 산물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개념이다. 라오미의 작업에서 엿보이는 거대하고 스펙터클한 선동적인 효과, 일제 강점기 관광주의를 선동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엽서의 이미지, 북한이라는 국가를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맞물려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연극성,’ 즉 극장의 의미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극장 국가’가 지닌 비판적인 뉘앙스와는 차이를 보인다. 그의 역사화는 국가나 역사적 기억을 공동체의 것으로 축약하고 강요하는 국가주의적인 태도나 예술적 의도를 지니지는 않는다. 권력의 부분으로서 선동화의 전통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굳이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라오미의 그림에서 흥미로운 점은 특정한 그림의 소재나 내용 그 자체를 넘어서 그의 역사화가 회화의 안과 밖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바다극장에서 열린 전시회 《동시상영》(2018)에서 현수막처럼 무대 위에 드리워진 라오미의 그림은 무대 배경에 해당하며 앞쪽에 추가로 그려진 패널은 전형적인 무대 설치를 연상시킨다. 작가가 경험하거나 갈 수 없는 장소를 다루기 때문에 본인과 관객의 정보 부족 현상을 상상력으로 채워야 한다면 연극은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기재임에 틀림이 없다.
실제로 라오미에게 영향을 미친 토월회 멤버 원세하 또한 1920-30년대 사회주의 연극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1920-30년대 바우하우스 내에서 행해졌던 사회주의 실험예술은 총체 예술을 표방한 바 있다. 연극은 다양한 감각기관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실제 접할 수 없고 목격할 수 없는 금강산, 그리고 이제는 폐허가 된 청계극장의 과거에 대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꽤 효과적이다. 따라서 라오미가 강조하는 ‘연극성’ 혹은 ‘극장’의 개념은 내용보다는 관객과의 소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에 가까워 보인다.
타블로 비방과 망각의 장소성
그렇다면, 라오미의 회화가 지닌 연극적인 특징이 그의 주제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언급한 바와 같이 라오미 회화는 주로 역사적인 서사를 다룬다. 근대 인천항의 역사를, 금강산은 갈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문학과 예술의 주요한 영감의 대상이 된 장소이며, 단둥의 국경은 현재 한국이 처한 정치, 역사적인 상황을 바로 보여준다. 동시에 라오미는 이러한 장소를 굳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태도, 이데올로기와 연관시키지는 않는다. 그림 속 이미지가 몇몇 유명한 장소를 제외하고 관객에게 낯설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다극장에서의 금강산이나 문화역서울 284에서 전시되었던 <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2020-2021) 속 단둥 지역은 관객에게 상당히 익숙지 않은 장소들이다. 게다가 ‘동시상영’의 <느리고 장중하게>(2018)에서 금강산의 이미지는 북한화를 연상시킬 만큼 과장되고 도식적인 특성을 지닌다. 관객들의 접근이 금지되었거나 어렵다는 점에서 금강산은 더욱더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이 금강산을 찬양하거나 정반대로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연극’이 원래 허구의 세상을 관객의 눈앞에서 재연(reenact) 해내기 위한 것이라면, 라오미의 금강산 회화도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라오미의 그림에서 중앙에 있는 금강산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신화 속의 장소와 같이 보인다. 게다가 최근 한국인들이 금강산 여행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이 장소는 더욱 낯설게 다가온다. 따라서 필자는 라오미가 애초에 현실에 존재하지만 다양한 연유로 낯설어지고 멀어진 장소를 택하여 왔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인천항의 작은 부두는 각종 개발정책과 기록의 부재로 과거의 기억은 희미해진 상태이며, 이러한 망각의 상태야말로 작가가 허구적으로 자신의 역사화를 그릴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게 된다.
최근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전시된 <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에서 작가는 중국과 북한의 경계선에 있는 공간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를 위하여 작가는 로동신문이나 각종 사진 자료를 통하여 접하게 된 북한 인물상을 중간마다 배치한다. 특히 라오미 회화에서 반복적으로 물이나 안개가 이미지들을 감싸면서 서로의 장면을 연결한다. 자연스럽게 근경과 원경이 혼동되게 되고 파도에 휩쓸리듯이 여러 시, 공간적 배경을 지닌 이미지들이 한 화면 속에 압축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북한 주민으로 보이는 여인도 여느 인물상과 그리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단둥에서 본 풍경이 원칙적으로 민족의 비극이라는 서사화의 테마를 떠올릴 것 같지만 오히려 국경 지역의 이미지는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라오미는 이번 전시에도 금강산에 대한 음악, 문학적 표현을 담은 나레이션, 일반인들의 감상을 담은 사운드 아트와 설치 작업을 선보인다. 작가는 금강산을 직접 방문하고 볼 수 없는 관객을 위해서 이전 관광객들이 금강산을 방문한 후에 느낀 감상을 모아 녹음하고 관객에게 들려준다. 경험담의 단어들을 정리해서 나름의 드로잉도 만들어본다. 언어를 사용해서 만들어진 시는 결국 금강산이라는 장소가 무엇인가 하나로 결론 지어질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장소에 대한 관객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금강산은 한반도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아이콘에서 관찰의 대상으로 변화하게 된다. 흔히 국가나 공동체의 서사에서 유명한 자연경관은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고는 한다. 반면에 라오미의 회화에서 금강산은 경외의 대상인 동시에 관찰과 논의의 대상이다. 관객은 금강산에 대한 다양한 감상을 들으면서 자신이 보는 회화 속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오미 회화가 지닌 연극성은 환상의 장소, 시간을 재연해내는 중요한 미학적 방법인 동시에 그것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극장’이 의미하는 바 그것은 리얼리티의 깊이나 영속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인천항, 단둥, 금강산과 같은 역사적인 장소들은 낯설지만, 일상적이고 모호한 관찰의 대상으로 남는다.
컬렉션: 과거와 현재의 만남
문학비평가 라몬 살디바(Ramon Saldıvar)는 ‘후기 구조주의(post-structurism)’가 우리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시한다. 우리 시대 “포스트”의 개념은 이미 각종 경계가 허물어진 상황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민주의에 반하여 후기 식민주의가 촉발되었다면, 전통적인 인종과 식민지의 계층 구분에 근거해서 비판적인 논리를 개진하는 것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라오미의 ‘역사화,’ 혹은 ‘서사화’에 등장하는 서사와 장소의 역사적인 진실성이나 확정성은 논외가 되고 있다. 게다가 역사적 기록이 사라졌거나 갈 수 없는 장소의 경우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수많은 간접경험뿐이다. 물론 서로 상충할 수도 있는 다양한 간접경험이야말로 역사적 진실성, 장소성에 대하여 더욱 유연한 자세를 취하게 해준다. 정보와 이미지가 쏟아지는 시대,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강제적으로 사라진 장소들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진행형으로 돌리고 관객의 시선에서 듣고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전시에는 라오미의 작업과 송은문화재단이 함께 전시된다. ‘실향민’이라는 창업주의 정체성이 반영된 도자나 그림의 컬렉션은 북한의 풍경과 서사를 다룬 컬렉터가 후원하는 젊은 현대미술의 작가와 만나게 되는 셈이다. 작가는 컬렉션의 도자기를 모아서 2층에 폭포가 떨어지는 듯한 대형에 따라 배열하였다. 언급한 바와 같이 라오미의 <끝없는 환희를 그대에게>(2020-2021) 속 단둥 지역은 관객에게 상당히 익숙지 않은 장소들이다. 게다가 ‘동시상영’의 <느리고 장중하게>에서 거대한 물줄기와 급류는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거스르고 그 틈을 파괴하는 절대적이고 폭력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컬렉션과 라오미의 작업이 지시하는 다양한 시, 공간의 틈을 극복하고 서로 만나게 만들어주는 힘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오미가 미술사를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별반 참고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컬렉터와 원작자의 의도나 생각보다 지금 과거의 물건과 시각문화를 감상하고 재배열하는 작가, 혹은 현대인의 시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장면과 대상을 조합해서 예상치 못한 감상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라오미 회화 속 장면을 연상시킨다.
세 번째 층에는 라오미가 전시 기획자로서 자신의 작업과 컬렉션을 나란히 배치한다. 다양한 매체, 출처, 미술사적 시간성을 지닌 이미지와 물건은 사실 여부나 역사적이고 소재적인 연관성을 강요하는 방식에 반기를 들고 있다고도 보아진다. 결국 무엇이 재현되었느냐보다 무엇이 전시 감상의 프레임을 정하는가가 중요하다. 연장선상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고 역사적으로 혼동된 미술관의 오래된 컬렉션과 미술관이 후원하는 젊은 작가의 만남은 단순히 오래된 미술관의 컬렉션을 현대미술 작가의 작업과 얼마나 ‘잘’ 연결할 수 있을지를 시험해보는 장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온 물건과 현대미술 작가의 작업이 서로 병치되어서, 풍경, 역사적 기억, 재현의 문제를 어떻게 공유하고 있는지 관객이 관찰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덧붙여서 최근 국내 미술계에서 특정 기업의 창업주가 오랫동안 수집해온 컬렉션이 초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와 연관해서 OCI 미술관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미술관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컬렉션을 대중에게 보여줄 다양한 방법이 강구되고 있다. 송은문화재단의 경우 지난 10년간 한국 현대미술에서 젊은 작가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공간이어왔다. 최근에는 새로운 전시 공간의 오프닝을 앞두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전후 미술계의 사정과 개인 컬렉터의 취향이 지닌 가변성을 고려해서 우리나라 컬렉션과 컬렉터의 역사를 정리해야 하는 중요한 역사적 과업을 상기시킨다. 물론 전시의 끝에 예상치 못한 결과들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라오미의 역사화가 보여주듯이 이제 역사나 서사에 대한 유연한 태도는 오히려 잊힌 역사를 재발굴하고 새롭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덕목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어떤 결과와 관객의 반응이 나올지 사뭇 기대된다.
History Painting of Rhaomi: Tableau Vivant in the 21st Century
Dongyeon Koh(Art Historian)
Historical narratives and contemporary art
In contemporary art, how should an artist represent a historical narrative and convey it to audiences? It is a question shared by all artists, but it is a more desperate question for artists who deal with history with few traces or evidences or who deal with memories of the past that is thought to be polluted. Historically, in 19th century in France, during the republican era, a 'tableau vivant' appeared, which reenacted historical scenes as if historical figures interacted with each other on the stage of a play.* This is because nothing is as effective as the narrative of a particular country or nation in forming a community. In contrast, in the age of digital media and the age of social media communication where the radius, speed and scope of sharing various types of information have expanded exponentially, a more flexible attitude is required for ways of remembering and sharing events. It has become difficult to determine whether it is true, and unprecedentedly, various classes can have access to various information of the past. It is inevitable that the same fact can be read differently depending on "who sees what, when, and from what angle"
The reason for the lengthy explanation on how to remember the past was that painting and installation of Rhaomi eventually deal with problems of representation and historicity. Recently, 'Culture Station Seoul 284' showcased a huge panel painting, and in this exhibition, in the painting of Rhaomi who is acting as an artist and exhibition designer, the horizontally unfolded composition makes it easy to create a story by unfolding images derived from different time and space. This depicts the iron bridge that runs through Dandong(丹东) in China and the Yalu River and the smiling men and women in different sizes depending on the distance, and as if watching a movie, audiences follow the screen, connect the images and imagine their own story. This is the moment when the two-dimensional screen has scalability. As in 'tableau vivant', a specific scene on the screen means a decisive moment in the flow of the entire history.
Furthermore, in Rhaomi's painting, places or events that we generally cannot access or has flowed away in the past appear from Mt. Geumgang, Incheon Port, to the border area near the Yalu River. The artist personally visited Yeonan Pier in Incheon or the border area between North Korea and China for historical investigation, but Mt. Geumgang or Dandong are places that cannot be visited or places to observe areas by bypassing that cannot be visited. Also, although Incheon Port is a place with painful historical memories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memories of tragedy remain very fragmentary. The artist has been paying attention to old and small pier areas that fade away into historical footnote, such as Bukseong Pier which is currently being reclaimed, Manseok Pier, and Hwasu Pier, which have lost their functions. This process eventually requires a lot of imagination from the perspective the artist and audiences, even if it goes through the stages of historical evidence and investigation.
Rhaomi thus compares her paintings to a play. To explain further, she mentions Se-ha Won(元世夏) who was a member of the Towolhoe(土月會) and a theater stage director in the 1920s and 1930s, and explains that she imagines a canvas of material and size that could be used as a background for a theatrical stage and draws.** In fact, Rhaomi hung down the canvas of <The Sightseeing Theater, Diamond Mountain Tour Project>(2017) from the ceiling like a backdrop, and in the exhibition held at the ruined Bada Theater on the Cheonggyecheon Stream, she put a huge painting on the stage and held a concert or performed sound work in front of the painting. In other words, she has been expanding her painting as a part of a play and performing arts. Then, why did Rhaomi actively introduce a play to the recall of past memories? How will a play as a field of history be accepted by modern audiences? Audiences cannot know exactly the true or the false, but how should audiences see events, places, and times of the past in Rhaomi’s painting buried in oblivion?
Tableau Vivant in the 21st Century
Critic Won-Seok Ko explains Rhaomi’s historical painting by borrowing from the concept of the title of the artist's painting series <Theater State>. In the classical sense, ‘Theater State’ reminds that the modern state is the product of artificially created and manipulated ‘political apparatus’ and ‘instigation’ to create power.** The huge and spectacular inflammatory effect indicated in work by Rhaomi, the image of a postcard made to instigate tourism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 situation of looking at the country of North Korea from afar are intertwined, making it possible to interpret it like that naturally. However, in the classical sense, ‘theatricality’ mentioned here, that is, the theater, has a different meaning from the critical nuance of ‘the theater state’. His history painting does not have a nationalistic attitude or artistic intention to condense and enforce national or historical memories to be those of the community. This is because it does not only follow the tradition of incitement as part of power and does not but also contain bitter criticism of the totalitarian system.
On the other hand, what is interesting to discover in paintings of Rhaomi is that her history painting goes beyond the material or content of specific paintings, and connects the inside and outside of the painting. In 《Simultaneous Screen》(2018), an exhibition held at the Bada Theater, Rhaomi’s painting hung down on the stage like a banner means the stage background, and the additionally pained panel in the front is reminiscent of a typical stage installation. If an artist has to fill the lack of information of the artist and audiences with their imagination because the artist deals with places that cannot be experienced or visited on her or his own, then the play must be the most effective tool.
In fact, it can be inferred that Se-ha, Won, a member of the Towol club who influenced Rhaomi, was also influenced by socialist plays in the 1920s and 1930s. The socialist experimental art carried out in the Bauhaus in the 1920s and 1930s advocated was a total art. A play is quite effective in stimulating the audience's curiosity about the past of Mt. Geumgang, which cannot be actually reached or witnessed and the past of the now ruined Bada Theater in that a play stimulates various sensory organs. Therefore, the ‘theatricality’ or ‘theater’emphasized by Rhaomi seems closer to a strategy for maximizing communication with audiences rather than placing meaning on the content itself.
Tableau Vivant and Spatiality of Oblivion
Then, how do the theatrical characteristics of Rhaomi's painting get involved in her theme? As mentioned earlier, Rhaomi painting mainly deals with historical narratives. It shows the history of the modern Incheon port, and Mt. Geumgang that cannot be reached, but is a place that has historically been the subject of major inspiration of many literary and arts, and Dandong's border which shows the current political and historical situation of Korea. At the same time, Rhaomi does not necessarily associate these places with specific historical events, attitudes, or ideologies. This made images in the paintings seem unfamiliar to audiences except for some famous places. Mt. Geumgang in Bada Theater or Dandong area in <Per te d'immenso giubilo >(2020-2021) exhibited at Culture Station Seoul 284, are quite unfamiliar to audiences. In addition, the image of Mt. Geumgang in <Adagio>(2018) of 《Simultaneous Screen》 has exaggerated and schematic characteristics that are enough to remind North Korean painting. Mt. Geumgang feels much more like a fantasy in that it is forbidden or difficult for audiences to access.
However, it is difficult to think that this fantasy is intended to praise or criticize Mt. Geumgang. If 'play' was originally intended to reenact a fictional world in front of audiences, Mt. Geumgang painting of Rhaomi plays this role. Mt. Geumgang in the center of the painting of Rhaomi looks like a mythical place that does not actually exist. Moreover, as Koreans have recently been unable to travel to Mt. Geumgang, this place feels even more unfamiliar. Therefore, I think that Rhaomi has selected a place that originally exists in reality, but became unfamiliar and distant for various reasons. In fact, as for the small pier in Incheon Port, memories of the past have been blurred due to various types of development policies and absence of records. This state of oblivion allows this artist the freedom to draw her history painting fictionally.
In <Per te d'immenso giubilo>, recently exhibited at Culture Station Seoul 284, the artist took the space on the border between China and North Korea as an object of observation. For this purpose, this artist places North Korean figures encountered through the labor newspaper or various photographic materials around all over the painting. In particular, in painting of Rhaomi, water or fog repeatedly surrounds the images, connecting scenes. Thus, the near and far views are naturally confused, and images with various spatiotemporal backgrounds are compressed into one screen as if being swept away by waves. However, if viewers take a closer look, a woman who looks like a North Korean resident is also no different from any other figure. The scenery seen in Dandong is, in principle, likely to evoke the theme of the epic of the nation's tragedy, but rather the image of the border region remains ambiguous.
In this exhibition, Rhaomi will also showcase music about Mt. Geumgang, narration containing literary expressions, sound art and installation work with the appreciation of the general public. This artist collects, records, and tells audiences appreciation of previous tourists who visited Mt. Geumgang. This artist organizes the words of experiences and creates drawings. Poetry made using language reminds audiences that the place 'Mt. Geumgang' is a place that cannot be concluded with one thing. This is to arouse curiosity of audiences about places they cannot directly experience.
Therefore, Mt. Geumgang is changed from an icon symbolizing the beauty of the Korean Peninsula to an object of observation. Usually, famous natural landscapes in the narrative of a country or community are considered absolute. In contrast, in Rhaomi's painting, Mt. Geumgang is an object of awe as well as a subject of observation and discussion. While audiences listen to various things about Mt. Geumgang, the audiences wonder the meanings of scenes in the painting they see.
In this regard, the theatricality of Rhaomi painting is both an important aesthetic method of reenacting the place and time of fantasy and a method of denying its certainty. This is because the meaning of "theater" is far from the depth and permanence of reality. Consequentially, historical places such as Incheon Port, Dandong, and Mt. Geumgang are unfamiliar, but come as an object of ordinary and ambiguous observation.
《Border Crossings - North and South Korean Art from the Sigg Collection》, Kunstmuseum Bern, Swiss / by Wonseok Koh
라오미가 서양화를 전공하고 무대미술과 사극영화미술에 참여했으며 한때는 문화재연구소에서 일하며 복원모사가를 꿈꾸기도 했다는 정보는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요긴하다. 라오미는 본격적인 작품활동 이전에도 현재의 장소를 과거의 어떤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작업을 통해 사라진 시공간을 재현하는 예술행위의 일부를 담당해왔다. 현재를 과거로 만들고, 다시 그것을 현실성을 갖춘 공간으로 환원시키는 매력적인 일을 수행해왔던 것이다.
작가로서 라오미는 오래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 왔다. 과거를 지나가버린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현재의 가상공간으로 변환시키면서 독특한 시공간적 상상력을 발현시키는 그의 작업은 과거를 현재화했던 일을 반복했던 직업적 경험에 그의 작가적 혹은 체질적 관심이 합쳐진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살아 있는 무엇으로 바꾸는 그의 작업은 밀도 높은 구성의 회화로 표현되거나, 혹은 그 회화까지를 포함한 복합적 공간설치로 표현된다. 매 작업이 다분히 복합적 상황을 포함한 프로젝트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는 매번 작업의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사전 연구를 진행한다. 그가 모으는 광범위한 역사적, 혹은 문화적 자료들은 과거 특정한 장소의 서사 구조와 이미지를 재발견하고 표현하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작가의 다양한 실천에 의해 구축된 하나의 시공간은 그것과 유사성을 가진 새로운 시공간과 연결됨으로써 그 의미의 영역확장을 시도한다. 그의 작품 안에서 전통과 현대, 가상과 현실, 동양과 서양이 서로 조우하고, 동시에 그 이면의 빈 공간도 생성되는 것이다.
스스로 무대가 되는 라오미의 그림들
<극장국가>(Theater State)는 1980년 미국의 인류학자인 클리포드 기르츠(Cliford Geertz)가 19세기발리섬의 수도인 네가라(Negara)를 지칭하며 만든 말이다. 그러나 그 용법은 주로 냉전구도에서 적극적인 프로파간다를 구사하던 국가주의적 면모를 일컫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대중동원식 프로파간다 이벤트가 수시로 벌어지는 북한을 묘사하는 저서명으로 잘 알려지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일제 식민지 직전에 있었던 대한제국 정부를 묘사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했으니 특정 이데올로기 기반의 지역만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2점으로 구성된 라오미의 회화 <극장국가>는 1900년대초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반도의 근대화된 모습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된 엽서, 중국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도시인 단둥에서 바라본 압록강의 사진, 중국의 관광객들을 유인하는 엽서이미지 혹은 북한에서 역동적으로 진행중인 고층아파트 건설을 홍보하는 마케팅 사진 등 여러 이미지들을 레퍼런스로 삼고 있다. 원색 중심의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구도로 표현된 그림 안에서는 가파르게 솟아 있는 금강산의 암벽 봉우리, 서구 고전미술의 동상이미지 부분, 압록강 위 끊어진 다리, 북한식 고층아파트의 생경한(uncanny)한 외관, 서구 고전 건축물의 고전적 기둥과 바닷가로 이어진 길 등 동서양의 요소들과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적 속성의 이미지들이 혼재되어있다.
‘극장국가’라는 말에서 ‘극장’은 연출된 프로파간다를 강조하는 국가주의적 문화전략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펙터클을 동반하는 국가 공식행사 등을 통해 정부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전략은 제국주의와 냉전시대를 거쳐 오늘날에까지도 일부 명맥이 이어오고 있다.
<극장국가>가 흥미로운 것은 그가 극장의 실존적 요소를 이용해 극장국가의 개념적 속성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가 극장의 무대 이미지를 자주 그렸던 이전의 경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업이 이미 철지난 국가주의의 기억을 소환시키는데 머무르지 않고 생생한 현재성을 획득하는 이유는 다양한 시각매체가 일상적 삶의 저변에 깔려 있는 오늘날에도 국가주의의 그림자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브렉시트가 상징하던 동시대적 국가주의는 코로나 19로 인한 국가단위의 방역시스템에 의해 더 공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국가는 여전히 미디어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단위이며, 일상의 삶 속에서 아직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삶이다. 극장은 추상과 실제 사이를 오가며 수시로 변모하는 개념으로 그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호월일가>는 작가가 사용했던 인천의 작업실 근처에 탈북민 자매가 운영하던 북한음식점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서울과 가까운 거리의 항구도시인 인천은 근대 한반도의 최초 개항도시였고, 쇠락한 구도심의 근대건축물들과 국제자유경제지구의 화려한 고층건물들을 동시에 가진 메트로폴리스며, 다수의 이주민들에 이어 최근에는 탈북민들이 거주비율이 증가하고 있는 도시다. 라오미는 당시 작업실 인근의 식당을 운영하던 탈북민들과 대화하면서 금강산 관광사업이 남북관계경색으로 인해 중단된 지 10년이 되었음을 상기했다고 한다.
많은 설화를 탄생시킨 금강산은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이상향처럼 여겨지던 절경의 장소였고, 분단 이후 남한에서는 휴전선 너머의 가볼 수 없는 비경처럼 여겨지던 곳이다. 2천년대 초반 남북한 정상회담 이후 양국 관계가 급격히 좋아지던 시기에 시작한 금강산 관광사업은 한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남북관계 복원과 협력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나, 남북관계가 다시 경색되었을 때 허망하게 중단되어 물경 10년의 시간이 지났던 것이다.
라오미는 시대가 꿈꾸는 것들에 대한 허망함을 상기하고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근대의 산물인 분단 이후 금강산은 사회주의의 영토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에 관한 설화도 의도적으로 수정되었다. 분단 이전부터 하늘로 올라가던 선녀는 이제 더 이상 올라갈 수 있는 하늘이 없어졌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도 이제 더 이상 해와 달이 될 수 없다. 설화가 제거된 금강산의 풍경이 이전처럼 비경으로서의 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라오미는 근대의 짧은 역사가 수천년에 걸쳐 형성된 정체성을 변질시키는 사실에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근대 시기 금강산에 관한 무대, 관광엽서, 조선화, 금강산에 많이 살았다는 호랑이 등의 이미지 자료들을 수집했고, 이것을 기반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이 작품 속에는 금강산의 가파른 봉우리들과 폭포, 소나무 숲과 호랑이 등의 이미지가 근대식 서양 가옥의 벽난로나 계단 손잡이, 화병이나 조명, 시계 등의 이미지들과 혼재되어 있다. 작가는 5미터 길이의 대형 회화인 이 작품은 전시장 안에 배치되는 일반적 회화라기보다 일종의 무대배경으로 간주하고 활용한다. 마치 색바랜 흑백사진의 색감처럼 이 그림의 색상은 모노톤으로 절제되어 있다. 그는 폐관된 극장의 무대 위에 이 그림을 배경으로 세워놓고 그 앞에 카펫을 깔거나 오래된 의자 등을 놓는 등 다분히 연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실제로 오래된 카메라를 세워놓고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여 마치 근대 시대 이상향적 배경이미지를 가진 사진관에서 흑백사진을 찍은 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퍼포먼스, ‘100년전의 스튜디오’를 실행하기도 했다.
무대는 복합적 시공간이 공존하는 환상의 장소다. 무대로 소환된 금강산은 근대가 단절시킨 전통을 재연결하는 라오미의 예술실천에 의해 그 비경의 아우라를 다시 획득한다. 그것은 현재에 소환된 근대이자 근대 이전의 전통으로 근대를 극복한 근대이기도 하다. 또한 현재의 번잡함이 과거를 만나 가상의 공간으로 치환된 또 다른 현재이기도 하다.
《Border Crossings - North and South Korean Art from the Sigg Collection》, Kunstmuseum Bern, Swiss / by Wonseok Koh
Rhaomi majored in painting, participated in stage and historical cinema production, and once dreamt of becoming a conservator-restorer while working at the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This background has effectively influenced her vision and understanding for her own work. Even before she made a full commitment to become the artist we know today, Rhaomi had experiences with some artistic practices of recreating lost time and space through transforming a current physical space into something of the past. As an artist, she has consistently shown interest in the things that are old and perish over time. Her work, which does not dismiss the past but expresses a unique spatial imagination by transforming it into a present virtual space, can be seen as a result of the combination of her professional experiences with visualizations of the past as well as her artistic interest.
Rhaomi’s work, which converts disappearing things into objects of the present, manifests itself as dense paintings or complex space installations. Each project comes with strong characteristics and includes complex situations. Prior to engaging in her work, she makes sure to conduct in-depth preliminary research on the given subject. The extensive historical or cultural materials she collects play an important role in rediscovering and expressing the narrative structure and images of a certain place from the past. An exclusive space, built by the artist’s various practices, attempts to expand its meaning by building connections with a new time-space based on their similarities. In Rhaomi’s work, tradition and modernity, virtuality and reality, the East and the West are all encountered, while simultaneously paying homage to the empty space that is left behind.
Rhaomi’s Paintings Make Their Own Stage
The term “Theater State” has its origins in 1980, when American anthropologist Clifford Geertz referred to Negara, the capital of Bali, in the nineteenth century. Over the years, however, the term was used more commonly to refer to the nationalistic aspect of active propaganda during the Cold War. It is particularly well known to the public as the title of a book by Hunik Kwon and Byung-Ho Chung describing North Korea, where the use of propaganda by the government is often seen. But the definition of the terminology cannot be seen as a concept that refers only to regional states with specific ideological ties, as it was recently also used to refer to the Korean Empire—the last Korean monarchy prior to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Rhaomi’s two-piece painting, Theater State, used various images as references: a postcard produced to showcase the modern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the first decade of the nineteenth century, a photograph of the Yalu River viewed from Dandong (the Chinese city closest to North Korea), a postcard image attracting Chinese tourists, and a marketing photograph made to promote the construction of high-rise apartments in North Korea. In this painting, with intense primary colors and a dynamic composition, the elements of East and West as well as images of capitalism and socialism are mixed together. This can be seen in the steeply rising rocky peaks of Mount Geumgangsan, the fragments of Western classical sculptures, the depicted broken bridge over the Yalu River, the uncanny exterior of a North Korean-style high-rise apartment, the classical pillars of Western architecture, and the steps leading to the seashore.
In the term “Theater State,” theater can be under- stood as a concept for the nationalistic cultural strategy that emphasizes the choreographed propaganda. The strategy, used by the government to reaffirm its power through spectacular national events, dates back to the imperialist era, and to some extent, continues to be seen to this day.
What makes Theater State intriguing is that the artist expressed the conceptual nature of the theater state by actually using elements of the theater. It is worth recalling that she used to frequently paint the stage backdrops in theaters. Her works not only recall the memories of outdated nationalism, but also acquire a vivid realism. This is maybe because in reality shadows of nationalism still prevail, even despite the abundance of visual media underlying our daily lives. Contemporary nationalism exemplified by Donald Trump as US president and Britain’s Brexit proliferated to other countries, exacerbated by the state-level epidemic prevention systems caused by COVID-19. National governments remain the most influential unit in the media, and they exert the biggest impact on our daily lives. The function of the “theater” remains vital and changes in accordance with the need of the state, used sometimes as a tool for cultural fantasy and at other times for direct propaganda.
Meanwhile, Tigers of the Diamond Mountains (pp. 208–09) was the name of a North Korean restaurant near the artist’s studio in Incheon, which was run by sisters who escaped from North Korea. Incheon, which is close to Seoul, was the first open-port city of the modern Korean Peninsula, a metropolis with modern buildings in the old city center and with fancy skyscrapers in the Incheon Free Economic Zone. It is also a place that has increasingly accepted North Korean refugees in recent years, in addition to the existing influx of a large number of immigrants. As she was talking with the North Korean refugees who were running the restaurant near her studio at the time, Rhaomi recalled that it had been ten years since tourism to Mount Geumgangsan was suspended mainly due to the strained inter-Korean relations. Geumgangsan was a magnificent place where many classic tales have their origins, as it has traditionally been regarded as a utopia in the Korean Peninsula. Since the division of North and South, the mountain was no longer a place to be visited by South Koreans, which led to it being designated as an unexplored region beyond the armistice line.
The Geumgangsan Tour project began when relations dramatically improved after the inter-Korean summits in the first decade of the twenty-first century. It then received the spotlight and was regarded as a symbol of the restoration of the cooperation between the two Koreas. With relations becoming fragile again, however, the project was suspended in 2008.
Rhaomi said that she created this work by recalling dreams of times past. After the division of the peninsula, Geumgangsan was placed in the territory of socialism, and classic tales about the mountain were intentionally revised. If such classic tales are erased from the memory of Geumgangsan, would it still be able to maintain its nature as before? Rhaomi was confused by how distorted its identity became in recent decades despite preserving its status for thousands of years. Thus, she collected images, including stage sketches of Mount Geumgangsan, tourist postcards, ink paintings, and images of tigers, who once lived in the mountain, and completed the work based on these images.
In this work, the images of steep peaks, waterfalls, pine forests, and tigers of Geumgangsan are mixed with images of fireplaces, staircase handles, vases, light fixtures, and clocks of modern Western homes. The artist creates quite the theatrical atmosphere by install- ing this large, five-meter-long painting as a backdrop for the stage of an imagined theater, with a carpet laid in front of it. The color of this painting is restricted to monochrome shades, such as the color of a faded black-and-white photograph. Rhaomi also conducted a performance called A Studio of 100 Years Ago by taking pictures of this installation with an old camera. These black-and-white photographs, containing the back- ground image of utopia, look as if they were taken in a photographic studio of the past.
The stage is a place of fantasy where complex time and space coexist. Summoned to the stage, Geumgangsan regains its unexplored aura through Rhaomi’s artistic practice of reconnecting traditions severed by modern times. Rhaomi’s work creates another reality where the hustle and bustle of the present meets the past and is replaced by a virtual space.
불로장생의 도상들 그리고 시대착오적 동시성
양효실 미학, 비평
한편 값으로 두 편, 심지어 서너 편도 볼 수 있는 영화관을 동시상영(同時上映, double feature) 영화관이라 한다. 연속 상영이 더 정확한 말일 텐 데, 그럼에도 그것이 동시상영(同時上映)으로 정착되었던 데는 한 편의 가격으로 두 편을 본다는, 두 편을 동시에(at the same time) 시청한다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편의 영화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두 편이 채우는/떼우는 시간, 가령 3~4시간의 동질성이다. 변두리 허름한 극장에서 우리는 우수한 영화나 시간가는 줄 모르는 영화가 아닌, 철지난 영화, 그저 영화인 영화를 시청하는 것이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갈 데가 없어서, 혼자서 메우는 시간이 동시상영관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렇듯 텅 빈 선형적인 혹은 양화된 시간을 전담한 동시상영관은 이제 폐관되고 있거나 한 편에 2000원을 내면 되는 실버영화관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동시상영관은 그 이름, 그 기능 방식, 그 생존 방식에서 가장 근대적이었지만, 오늘날의 초-근대적 시간의 흐름에서 밀려났고, 서울의 흉물스런 건물들이 그렇듯이 새로운 건물주나 어마어마한 담보 보증 대출금이 나타나지 않는 한 제 자리에서 ‘늙어가는’, 즉 기이한 ‘유기체’ 행세를 하고 있게 된다.
라오미 작가는 2010년 폐관한 청계천의 바다극장을 섭외해서 10.27~11.2일 사이에 <동시상영(同時上映, simultaneous screens)>이란 제목의 전시를 열었다. 작가는 동시상영관이었던 바다극장을 ‘동시에 존재하는 장막’이란 작가의 주관적인 의미에서 재전유했고, 그렇게 해서 사라지는 문화나 장소에 개입하는 자신의 미적 방식을 전시 제목에도 반영했다. 철지난, 즉 새로움을 욕망하는 관객의 흥미와의 ‘동시성’을 상실한, 어긋난 채 지금여기에 도착한, 과거인 채로 현재인 그런 시간성이 동시상영관인 바다극장을 매개로 무대에 오르게 된다. “동양과 서양, 현실과 이상, 전통과 현대”의 동시성, 그 둘의 분리불가능성에 천착해 온 작가의 바다극장인 것이다. 동시에 두 개의 막이 오르는 극장에서 우리는 그때와 지금의 혼종성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근대화, 산업화의 상징인 삼일고가도로 옆에 위치한”(작가의 말) 바다극장도 역시 사라질 것이다. 역사주의의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벤야민)을 동시상영이란 형식으로 보유했던 바다극장은 근대적 시간성의 ‘실재’로서, 근대의 환상 속 타자로서, 그렇기에 초-근대적 환상을 위해 이제 사라질 것이다. 살아있을 때나 죽어가고 있을 때나 바다극장은 흐르지 않는 물이 고인 늪 같은 곳이었다. 이제 기능도 맥락도 잃어버린 내부에 고인 시간, 2010년 이후로는 문을 열지 않은 이곳에서 ‘흐르는’ 죽은 시간에 작가는 집중한다. 이런 곳은 당연히 이야기, 상상력이 주인인 이야기가 흥건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년 9월부터 이곳을 방문했고, 1997에 벽에 붙여놓은 ‘관람자 준수사항’이란 문서나 3시 42분에 멈춰있는 시계처럼 망각과 부재를 따르는 예술가가 좋아하는 물건들/아카이브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회화적 이미지로 만들었다. 극장의 ‘주인’인 듯 살고 있는 비둘기나 1970년대 산업화의 역군이셨던 작가의 아버지가 초현실적인 화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곳은 무한질주하는 동질적 시간에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꿈이나 환상을 제공하던 극장이었고, 이제 남은 것은 낡고 늙고 추레한 먼지투성이의 ‘내부’이다.
그리고 과거, 이상, 추억을 물화하는 대신에 그것이 지금, 현재, 욕망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말하려고 이런 공간을 ‘활용’하는, 자신의 개입을 통해 ‘일시적으로’ 살아있게 만들고자 하는 타자의 방문이 있게 된다. 라오미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무대미술, 사극영화미술에 참여했었고, 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모사가를 꿈꾸었던 작가로 자신을 설명한다. 사극 영화 미술팀에서 이류미술인 ‘민화(民畵)’를 그리는 일은 작가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예술’이 아니다. 민화는 “정식 그림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화가나 떠돌이화가들”이 “서민들의 일상생활양식과 관습 등의 항상성(恒常性)”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기에 “정통회화에 비해 수준과 시대 차이가 더 심하다”(네이버 지식백과). 즉 민화는 미술사의 내재적, 발전적 연속성에 등재되지 못하며, 그것을 만들어낸 시대, 서민들의 욕망, 희망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도구적 산물이다. 서양화에서 민화로 ‘내려간’ 라오미는 평범한 사람 혹은 인간 일반이 욕망하는 “불로장생 (不老長生)”의 욕망이 민화란 형식 안에 다양한 도상들을 통해 표출된 데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이렇듯 직접적이고 집단적인 도상들에 대한 회화적 개입 혹은 회화로의 변용을 시도하고 있다. 언뜻 민화에 대한 충실한 반복·모방으로 보이는 라오미의 회화는 그러나 기존의 민화의 도상들을 자신의 주관적인, 나아가 동시대인의 집단적인 욕망과 접합, 융합함으로써 민화의 현재화에 골몰하고 있다. 사적인 것으로 가정된 우리의 욕망은 사실은 민화를 출현시킨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그랬듯이 집단적인 도상을 경유해서 시각화된다는 깨달음에 근거하여, 라오미는 민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시대 인간의 욕망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가까운 회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정통회화”에서 밀려난, 이제는 한물간 민화에 개입하는 것이나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난, 한물간 동시상영관에 개입하는 것은 라오미 작가에게는 같은 것이다. 그녀는 초근대의 가치인바 ‘최신식’에 도착하지 못한 패자들, 그러나 엄연히 지금도 우리의 욕망을 보유한 기이한 형식이나 공간으로서 공존하는 타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 사라지고 잊혀질 것들에게 생을 되돌려주는 것이 그녀의 관심이고 임무인 것 같다.
일상이나 현실에서 미술과 문화가 어떻게 권력과 연동하는지를 목격한 작가가 뒤져야하는 것은 전통이나 ‘향수’일 것이다. 전통은 향수와 연동하면서 현재의 헤게모니에 결탁하기 마련이고 예술가는 전통을 지금-시간으로 불러들여 그것에 생명을 수여함으로써 지나간 것은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라오미는 민화를 회화와 접합하고 바다극장을 자신의 ‘무대’로 재설치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번 전시가 “금강산 관광을 주제로 시작한 2017년 <유랑극장 프로젝트>의 일환”이며 다음 전시가 인천의 미림극장에서 열릴 예정인 것도 그런 연유이다.
작가는 남한과 북한 모두가 금강산에 수여한 문화적, 집단적 향수-욕망의 근거를 평양 출판사에서 발간한 <천하절승 금강산>의 문장들에서 확인해낸다. 금강산의 바위나 암자의 위치, 이름의 유래와 또 각각의 장소나 이름과 연결된 전설을 기록한 평양에서 나온 책은 이곳 한국인의 금강산 여행을 오래된 꿈, 전사(前史)로의 여행으로, 마치 극장에서 우리가 욕망했던 꿈으로 고정시킨다. 작가는 바다극장의 무대 위에 절정에 이른 단풍, 두 개의 계곡에서 쏟아지는 폭포, 단단하게 솟아있는 바위들로 구성된 일종의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혹은 저급한 키치 풍경화, 혹은 싸구려 공연장의 무대배경, 아니면 북한의 선전선동 공연의 뒷배경이어도 충분할 그림을 걸었다. 그리고 전시 오프닝인바 무대공연의 사회자 역할을 바다극장에서 37년째 일하고 있는 김경주 과장, “배우가 꿈이었던 관리인”에게 넘겼고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의 오래된 꿈이 뒤늦게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이후로 바다극장을 방문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평범하고 시시한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담긴 흑백 사진을 찾아내 “컬러링”하고, 멈춘 바다극장을 일주일간 움직이게 만들고, 금강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기억을 ‘조잡한’ 풍경화로 보충하고, 지금도 살아있는 현재인 1970년대식의 풍경(“양지리” 같은)을 회화로 재현하고, 심지어 작가 자신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지나가다 받았던 청계시장상인들의 집회 호소문을 전시하는 라오미의 부산하고 따듯하고 겸손한 개입은 변두리 사람을 자처하는 예술가의 전형적 태도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살아있는 것으로 재조정하는 일은 우리의 초근대적 동시대성의 잔혹한 ‘학살’에 대한 미약한 저항일 것이다. 변두리는 조금만 살고, 덜 사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사는 중심과는 다른 삶을 향유한다. 굳이 거대한, 과시적인 저항이 아니어도, 낡고 늙고 후진 삶의 동시대성을 소환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더라도, 제 때와 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들, 즉 시대착오적 존재들을 위한 무대에서 우리는 사라진 것, 사라질 것, 그렇기에 늘 돌아오고 있는 것들을 떠올리는 일의 게으름에 박수를 치고 있게 된다.
Images of ‘Eternal youth and longevity' and Anachronistic Simultaneity
Yang Hyosil Aesthetics, Art Critic
A movie theater in which you can watch two or even more movies at the price for one is called a simultaneous screens theater (a double feature theater). A consecutive showing would be a more accurate term. However, ‘simultaneous screens’ was settled because there was a logical basis of watching two films at the price for one, watching two at the same time.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films is not important. What is important is the time to kill/spend for the two movies, say, 3 to 4 hours of homogeneity. In a shabby movie theater on the outskirts of a city, one does not watch some enthralling, choice movies, but movies that are outdated, movies that are no more than just movies. The time for the simultaneous screens theater is a time to spend alone because one has nothing particular to do and has no other place to go. And the simultaneous screens theater, which was dedicated to an empty, linear or quantified time, is now being closed up or transformed into a silver movie theater that costs you 2,000 won for a film. Once the simultaneous screens theater was the most modern in its name, its mode of functioning, and its way of survival. Yet it has been pushed out from the current of the hypermodern age. Now, as usual for any ugly buildings in Seoul, it becomes an ‘organism’ that ‘gets old’ in its present place, i.e., an ‘organism’ that is weird, unless a new owner of the building or huge amount of mortgage loan turns up.
Rhaomi held an exhibition titled simultaneous screens between October 27th and November 11th, 2018, by arranging the Bada Theater in Cheonggyecheon, which was closed in 2010. The artist reappropriated the Bada Theater, which was a double feature theater, in her own terms, the ‘simultaneous screens’ theater. So in the exhibition title too, she reflected her aesthetic methodology of intervening in the disappearing culture or places. The temporality that is outdated, that is to say, that has lost the ‘simultaneity’ with the interest of the audience who desires novelty; that has arrived here and now with something gone awry; the temporality that is the past and the present at the same time: such temporality is showcased through the Bada Theater, which is a double feature theater. It is the Bada Theater for the artist who has delved into the simultaneity of “East and West, reality and ideal, tradition and modernity” and the separability of the two. In the theater that shows two films at one go, we experience the hybridity of then and now.
Bada Theater, “located next to the Samil Overpass, a symbol of modern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that has disappeared”, will also disappear. The Bada Theater, which owned the “homogeneous and empty time" (Benjamin) of historicism in the form of a double feature is the ‘real’ of modern temporality and the other in the modern fantasy. Hence it will disappear now for the hypermodern fantasy. Whether it was alive or dying, the Bada Theater was a place like a swamp full of stagnant water that does not flow. Now the artist focuses on the time that is stagnating in the inside that lost functions and context, on the dead time that ‘flows’ in this place that has not opened since 2010. Naturally, a place like this is full of stories, stories of imagination. Rhaomi first visited here in September last year. The artist, who cherishes oblivion and absence, made the story of the objects/archives she likes into pictorial images: things like the paper 'Visitor Guidelines’ posted on the wall in 1997, or the clock that stopped at 3: 42. Pigeons living there as if they were the ‘owners’ of the theater, or the father of the artist who was the pillar of the industrialization in the 1970s, appear on the surrealistic canvas. This was a theater that provided the dreams and fantasies to those who were exploited in the homogeneous time of endless rush; and what remains of it is the old, scruffy, and dusty 'inside'.
And instead of fetishizing the past, ideal, and memories, there is a visit by someone who ‘utilizes’ this kind of space to say that it continues now, in the present, through desire, who wants to make the space alive ‘temporarily’ through her intervention. According to Rhaomi’s self-introduction, she majored in Western painting, participated in stage art and historial film art, and dreamed of becoming a copier for restoration of cultural properties at an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It was very interesting for her to draw Minwha (民畵, Korean folk paintings, which is regarded as ‘second-rate’ art, in the art team for historical films. It is not ‘art’ proper as we know. A Minhwa is a painting drawn on the basis of “constancy of the daily life style and customs of the common people by nameless painters or wandering painters who had not received formal painting education”. So “compared to orthodox painting, it varies greatly in level and difference according to changing times.” (Naver Knowledge Encyclopedia). In other words, folk painting is not listed in the inherent and developmental continuity of art history. It is an instrumental product that directly reflects the era that created it, the desires and hopes of the common people. Rhaomi has ‘gone down’ from Western painting to Minhwa and became interested in the manifestation of the desire of ordinary people or the general public for ‘Eternal youth and longevity' through various images in the genre of Minhwa. She now attempts pictorial intervention in those direct and collective images or pictorial transformation of them into paintings. At first glance, Rhaomi’s painting seems to be a faithful repetition and imitation of Minhwa. However, she focuses on making folk painting up-to-date by combining and merging the folk painting works of the past with the subjective, and even collective desires of her contemporaries. Based on the realization that our desires assumed to be private are actually visualized through collective imagery, as was the case with the people in the Joseon Dynasty who created Minhwa, Rhaomi produces paintings that look like traditional folk paintings, but in fact close to subjective interpretations of the desires of contemporary people. It is the same for Rhaomi to intervene in Minhwa pushed out by “orthodox painting” and intervene in an outdated double feature theater pushed out by multiplex cinemas. It seems that her interest and mission are to give opportunities to the losers and others that were not able to arrive at the ‘newest’, which is the value of the hypermodern, but that still live along with us as odd forms or spaces that still hold our desires, and to give life back to those things to disappear and be forgotten.
The artist, who has witnessed how art and culture are linked to power in daily life and in social reality, would have to explore tradition or ‘nostalgia’. As tradition is linked to nostalgia, it is bound to collude with the present hegemony. And by bringing tradition into present-time and giving it life, the artist tries to prove that the past things are still alive. Rhaomi does this by bonding Minhwa to modern paintings and re-installing the Bada Theater as her ‘stage’. For this reason, this exhibition is “The Sightseeing Theater Project", which started in 2017 with the theme of Diamond Mountain Tour, and the next exhibition is planned to be held at Mirim Theater in Incheon.
The artist confirms the basis of cultural and collective nostalgia-desire that both South Korea and North Korea gave to Mt. Geumgang in the sentences of Geumgang Mountain, the Scenery Unparalleled in the World published by a Pyongyang publishing house. The book records the location of rocks and hermitages on Mt. Geumgang, the origins of names, and the legends connected with places and names in the mountain. The book fixes the trip of Koreans onto Mt. Geumgang as an age-old dream, as a trip to the past history, as if a dream that we desired in a theater. On the stage of the Bada Theater the artist hung pictures depicting autumn leaves at their peak, the waterfall pouring down from two valleys, a kind of ‘technicolor cinemascope’ consisting of soaring, massive rocks, or vulgar Kitsch landscapes, or the stage background of a cheap performance hall, or paintings that would fit the backdrop for the propaganda performance of North Korea. And as the opening of the exhibition, Kim Kyung-ju, who has been working at the theater for 37 years and who “had dreamed of becoming an actor”, is appointed as the host of the stage performance. So, although late, an old dream of one person is realized.
Rhaomi remembers people who have visited the Bada Theater since the 1970s; finds out and does “coloring” of the black-and-white photos keeping the dreams and hopes of those ordinary and unimportant people; makes the Bada Theater that had been closed operate for a week; supplements the memory of the people visiting Mt. Geumgang with ‘crude’ landscape paintings; represents the 1970s-style landscapes (such as “Yangjiri”), which is still alive now, in the form of painting; and even exhibits the leaflets for a rally she happened to receive from the vendors of Cheonggye Market around the time of her graduation from college. The busy, warm, and humble intervention of Rhaomi is a typical attitude of an artist who professes to be a person on the outskirts. Readjusting what is disappearing into what is alive would be a feeble resistance to the cruel ‘massacre’ of our hypermodern contemporaneity. By living only a little and in a lesser way at that, the outskirts lives a different life from the center that lives by ‘doing the best’. Even if it is not a massive resistance as if to show off itself, even if it is just an attempt to summon the contemporaneity of the worn-out, old, and backward life, we come to applaud the laziness of recollecting things that have disappeared, things that will disappear, and for that reason, things that always come back to us, on the stage prepared for things that have not found their own time and their own place, namely, for those anachronistic be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