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ver of shadows;潛影流江
글. 김보현 (정림건축문화재단)
사라져가는 것들을 만나본 경험이 있다. 유년 시절을 담은 옛 주택을 개발 단지에 묶여 철거되기 직전에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녹슨 대문에 빨간 엑스 자가 커다랗게 그어져 있는 모습을 마주했던 것이나 곧 사라질 동네 한복판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나 한 명 밖에 없다는 당혹스러움이나 하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다.
문제는 이 사라지는 것이 하나의 이야기로 남겨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점인 것 같다. 고장 난 라디오와 전축을 고쳐야 하는 직업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전국 방방곡곡을 옮겨 다닌 나에게 ‘사라지는 것’은 으레 ‘이동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심지어 기록할 만한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빨간 엑스 자가 커다랗게 그어져있는 옛집의 대문을 보고 당혹스러웠던 감정은 ‘사라지는 것’을 눈앞에 목도한 최초의 경험이었고 따라서 이것은 꼭 부여잡고 싶어도 부여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몸소 체험하는 것이었다.
여기 ‘사라지는 것’을 부여잡는 작품들이 있다. 하나는 양키시장에서, 하나는 대림시장에서 묶여있던 사연이라던가 혹은 되살려보려 애쓰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 전시를 기획한 또 하나의 작가는 멀리 접경 지역의 사라져간 얼굴을 화폭에 담고 흐르는 시간성을 표현한다. 어떤 작가는 균일한 풍경 속에 ‘적응’과 ‘진화’라는 간단한 개요로 설명되는 개체를 전시 공간 안에 불러들이며, 또 다른 작가는 사라진 것에 대하여 나지막한 질문을 던지는 사진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시도와 작업들은 어찌 보면 행동 양식(movement)이라 부름직한데, 예술가들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과 태도가 계속해서 어떤 삶의 무늬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정지필은 동두천의 양키시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가 상주하면서 오고 갔던 여러 물자들이 가득한 양키시장은 2021년에도 여전히 물건과 사람들이 흐르고 다시 또 고이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알록달록한 사탕들을 가지고 작가는 술을 빚는다. 술을 빚고 그것을 나눠먹는 행위에서 전생의 공유처(共有處)를 짐작해 보는 정지필 작가는 오색찬란한 네온사인 작업도 이번 전시에서 함께 선보인다. 삶 이전의 기억을 공유해 보고자 하는 진심은 시장의 한 귀퉁이에서 시작되어 전시장 깊은 곳까지 흘러들고 있다.
당신과 내가 나눠 먹은 음식의 기원이 살고 있던 어느 시간에 당신과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흐르는 시간에서 잡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되짚어 보는 행위는 작가 황호빈의 작품 속에서도 드러난다. 중국인, 조선족이라 쉽게 타자화되는 ‘그들’이 사는 대림동의 이야기를 거꾸로 파헤쳐 보는데, 대림동으로 이주한 노인이 전해주는 ‘꾸앙지앙황차이’ 음식의 레시피를 받아 적으며, 그 음식을 실제로 완성한다. 이는 시대의 변천, 역사의 흐름과 같은 거대한 시류 속에서 잠겨 들어갔던 개인의 미시적 기억을 현재에 다시 끄집어 내어, 집단과 개인의 틈을 불러 모으는 어떤 시도인 셈이다. 구비문학처럼 전해져오는 어떤 레시피는 작가가 기어코 기록하지 않았다면 으레 기억에서 사라졌을 많고 많은 사연일 테다. 여기서 작가의 태도는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거나, 안타까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저 현재 상황을 담담히 보여줌으로써 현재 우리가 서있는 지점에 대해 거리를 두고 가만히 생각해 보게 할 뿐이다.
작가 김푸르나의 작품에서도 거대 담론과 미시적 사연들의 틈 사이의 생명과 신체를 더욱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 ‘첨단 미래도시’라 자칭하는 어느 지역의 균일한 컬러칩 안에서 과거에 살았거나 혹은 지금도 스러져가는 생명들의 흔적을 ‘패턴’으로 만나보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과 이동하는 것은 정말로 동일한 것일까? 혹 사라지는 것은 새로 생겨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이동과 흔적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경계를 마주할 수 있을까? 김푸르나 작가의 <흐르는 기둥>을 바라보며 흔적과 경계를 되물어본다. 오늘도 도심 속 사소한 무늬를 기록하거나, 잃어버린 새의 이름을 추억하며 그의 부리를 채색하기도 하는 예술가들은, 선인지 면인지 심지어 공(空)인지 알 수 없는 그림자의 경계를 넘나든다. 계속해서 다르게 생긴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전사(轉寫)하는 것의 의미를 추적하는 김푸르나 작가의 작품은 제목 그대로 ‘공존하는 풍경’으로서 만나볼 수 있다.
이 전시를 기획한 라오미 작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수집해왔다. 누군가는 그의 작업이 “스스로 무대가 되는 그림”이라 하기도 하고, 원경과 근경의 혼재를 통해 “시선의 교차”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무엇보다 수많은 도상들 사이에서 잊혀진 사연에 주목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각 작가들의 이야기를 전시장 안에 수집하는 것이 하나의 결이라면, 작가 본인의 화폭에서는 접경 지역에서 흘러들고 또는 맴돌았던 이야기, 민화, 또는 사진, 이미지를 모아 마치 셰헤라자드의 이야기보따리처럼 다양한 서사의 협곡을 채우는 또 하나의 결인 셈이다.
특히 그의 이번 작품은 모노톤의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데, 절제된 색감 속에서 더욱 강조되는 것은 휘몰아치는 물결 속에서 잠영하고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는 전설이 된 ‘그들’의 얼굴이다.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진 속에서 배제된 채 참담한 설화나 환상 동화 정도로 치부되었던 과거의 시간이 라오미 회화 안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물장구를 치며 사라진다.
사실 그의 회화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으레 화면 가까이에 다가서곤 하는데, 특히 이번 작품들은 천일야화의 한 귀퉁이처럼 잊혀진 시간을 진하게 음미할 수 있게 한다.
생각해보면 이번 <River of shadows> 전시장은 각 작품에서 범람하는 시간성으로 말미암아 각기 다른 해안가에 가닿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과거에 맴돌고 있거나, 오직 현재로서만 존재하여 잊혀진 시간을 끌어올리는 다양한 시도들은 동두천의 양키시장에, 또는 연변, 단둥의 해안가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물 모두 ‘흐른다’는 표현을 쓰는 우리에게 다가왔다가 맴돌고, 다시 사라지는 조류(潮流)는 훈춘의 사진 작가 이군에게도 가닿는다.
무언가가 사라지고 그 기능을 잃은 것만 같은 풍경을 담아내는 이군 작가의 사진은 물성을 짐작하는 것을 넘어, 짐작 그 이상의 물컹한 느낌을 전달하는데, ‘사라지는 것을 포착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도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사라지는 것과 사라진 것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작가 이군의 사진은 아마도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일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풍경은 목욕탕의 세신대가 물에 젖은 채 남아있는 ‘광경’이다. 무언가가 사라지고 난 후 휘발된 물성을 짐작하는 것을 넘어, 사건 이후의 물성을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다. <Solid melts into air> 연작 중 멈춰진 연회장이라던가, 쭉 뻗은 지평선의 이미지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나서의 후희 또한 뒤섞여 맴돈다. 스키모토 히로시<Carpenter Center, Richmond,1993> 작품을 떠올려본다. 영화가 상영되는 모든 장면을 장노출로 촬영한 후 내놓은 텅 빈 듯한 하얀 스크린의 결과물은 시간성과 물질성을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사진이 전달하는 이러한 무게감을 이군의 <Solid melts into air> 연작에서도 떠올려보는 것이다. 그가 촬영한 텅 빈 광장은 ‘사라진 것’을 포착한 것일까 아니면 ‘모든 일이 이미 벌어졌음’을 포착한 것일까.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의 카메라를 거친다면, 우리의 뒷모습이 남을까? 아니면 텅 빈 전시장 벽면이 찍혀있을까?
사실 사라져가는 것을 부여잡고, 혹은 어떤 이야기로 남긴다는 것. 그 시도는 미술씬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어떤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큐레이터로 분해온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언어이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개인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을 때, 그 당사자성은 새로운 맥락을 열게 한다. 이번 <River of shadows;潛影流江>을 통해 나 역시,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드디어 하나의 이야기로 남겨본다. 작은 서문이지만 이렇게라도 남겨보고 부여잡는 것이 이번 전시의 커다란 움직임에 보탬이 되는 것이라 믿으며.